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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자동차여행 - 독일 뮌헨 유대인 강제수용소 다하우 Dachau 본문

유럽 여행/2012년 유럽 자동차 여행

유럽자동차여행 - 독일 뮌헨 유대인 강제수용소 다하우 Dachau

자판쟁이 2013. 9. 11. 08:30

 

독일 뮌헨 유대인 수용소 다하우 Dachau

유럽 자동차 여행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수용소 목적으로 건설된 최초의 수용소이자, 가장 오래 운영된 수용소로

아우슈비츠와 함께 나치 강제 수용소의 상징 같은 곳이다.

처음에는 정치범 수용소로 운영되다가 세계 2차대전이 터지면서

약 30여 개국의 사람이 이곳으로 끌려왔고 그중 3분의 1은 유대인이었다.

 

다하우 강제수용소 말고도 독일은 약 40여 개의 수용소를 세계 2차 대전 중에 운영했는데

유럽에 거주 중이던 9백만 유대인 중에 3분의 2가 이 기간에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그중에는 아이도 백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다하우 수용소에서도 3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는데

특히 세계 2차 대전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수감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영양실조나 전염병 등으로 사망자가 급격히 늘었다.

 

 

 

 

 

이곳에 이송된 사람들은 모두 저 문을 지나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다.

 

 

독일이 운영했던 강제 수용소에는 모두

Arbeit macht frei -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 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수감자들이 이 문을 들어서면서 느꼈을 공포와 긴장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듯하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오면 개인 신상 정보를 등록하고 이 방으로 와서 가지고 있던 모든 소지품을 넘겨주고

나체 상태로 이 방을 나가 샤워실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곳에 수용된 수감자들은 최소한의 식사만 배급받으면서

온종일 노동에 시달렸고, 상습적인 구타에 노출되어 있었다.

 

 

수감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과 저녁에 점호시간을 가졌는데

인원체크를 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서 한 시간씩 정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고 한다.

가끔 죽은 시체까지 끌고 나와 인원체크를 할 만큼 철저하게 이뤄졌고

인원이 맞지 않을 때에는 수 시간을 정자세로 서 있는 고문을 당해야 했다.

또 점호시간 중에는 모든 수감자들이 볼 수 있게 공개처형도 이곳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고통속에 죽어갔던 이곳에 발을 들여놓으니 한 서린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노동과 학대를 견디며 살아남든가

아니면 죽든가의 선택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용소에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막사 건물과

죽은 사람을 위한 화장터,

이렇게 2개의 건물로 되어 있었다.

 

 

화장터에 들어오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한 수많은 사람은 이곳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이곳 수용소에도 가스실이 있었는데 들어서자마자 공포감이 뼛속까지 전해진다.

이곳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는 어린아이조차 침묵하게 만들었다.

 

 

다하우 수용소에는 약 6천 명의 수감자를 수용할 수 있도록 지어졌는데

세계 2차대전 막바지에 이르렀을 땐 약 32,000명이 수용될 정도로 포화상태였고

악화된 식량 수급 상황에 전염병까지 겹치면서

앙상한 뼈만 남은 시체로 산을 쌓을 만큼 사망자는 늘어갔다.

 

 

그리고 더 많은 화장터가 추가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죽음과 공포가 엄습했던 이곳이 이제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되어 있었다.

독일 총리도 이곳에 와서 헌화했고

수용소를 돌아보다 보면 부모나 선생님과 함께 온 독일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일본인은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만

독일인은 본인들의 과오인 강제수용소를 개방해서

독일에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교육하고 있는 걸 보면

두 나라의 현재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

 

 

사진을 보고 설명을 읽을 때마다 머리가 쭈뼛 솟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진지하게 이곳을 돌아보는 독일 학생들을 보면

이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영혼도 그들의 뼈저린 반성에 어느 정도 위로를 받았을 것 같다.